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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으로부터 좀 오랜시간이 지났지만... 2편도 써왔습니다!
재밌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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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미진순, 한도린, 이춘살)
[완벽한 무대였습니다! 과연 한도린 선수- 명불허전 체조계의 여왕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줬습니다!]
[네, 지금 점수가 나오길 기다리는 한도린 선수의 모습이 화면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종이봉투를 뒤집어 쓴 상태네요!]
[저런 봉투를 뒤집어 쓰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수많은 추측이 나오고 있는데, 그 가운데 제일 유력한 가설은…]
와삭-
“크리스마스에 이미 했던 대회를 재방송하는데 저런 쓸데없는 해설은 편집해도 좋지 않았을까?”
아그작, 파삭-
“왜? 재미있지 않아? 저런 주제의 기삿거리 중에선 체조계의 신예랑 엮는 기사도 있던데. 읽다 보니 꽤 흥미진진하더라.”
대형 TV 앞 소파에 앉아 감자칩을 우물거리는 두 인외(人外). 스님들이 입는 가사를 걸친 채로 소파 한쪽에 기대어 누워있는 반삭의 여인, 이춘살의 등 뒤로는 아홉 개의 여우 꼬리가 살랑거리고 있었고, 소파 반대편에선 여성체 미믹 미진순이 끈적이는 점액질이 번들거리는 촉수와 함께 진순 박스 속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TV를 보고 있었다.
“와… 그런데 도린이 얘가 체조하는 건 볼 때마다 감탄밖에 안 나와.”
“그러니까 말이야. 평소에는 살짝 허당끼 있는 조용한 동네 친구인데, 저런 대회에 나간 모습만 보면 다른 사람 같다니까?”
미진순이 해설위원들의 해설과 함께 리플레이로 나오는 한도린의 체조를 보며 감탄하자, 이춘살은 킬킬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렇게 두 인외가 TV를 보며 잡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쿵- 쿵-
“어? 왔나 보다.”
미믹인 미진순이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이춘살이 그녀를 대신해서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현관문의 잠금을 풀고 문을 열자, 그 너머에는 한 여성이 목 위로 종이봉투를 뒤집어 쓴 채로 한쪽 팔에는 먹거리로 가득한 봉투를, 다른 팔에는 사람의 머리를 들고 서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비명을 질렀을 모습이었지만, 이춘살은 태연하게 봉투를 받아 들며 말했다.
“수고했어~ 오, 한우 육회도 사 왔네? 역시 체조계의 여왕님, 통도 크다니까!”
“체조계랑 통 큰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간만에 3명이 모두 모인 송년회니까, 이것저것 다 사 왔어.”
“역시 우리 도린이, 뭘 좀 안다니까? 진순아~ 우리 여왕님이 뭐 사 왔는지 한번 봐볼래?”
봉투를 들춰본 이춘살이 내용물을 확인하고선 싱글벙글 웃으며 거실로 달려갔고, 한도린은 그 뒷모습을 자신의 품에 안긴 머리로 바라보다가 픽 웃고 말았다. 신난 강아지처럼 좌우로 흔들리는 여우 꼬리들 탓이었다.
한도린이 화장실에서 가볍게 손을 씻고 거실로 나오자, 이미 거실 한가운데엔 푸짐하게 차려진 술상이 놓여있었다.
“오…”
“술은 주지 스님이 꿍쳐두었던 산삼주 항아리 한 동을 몰래 가져왔는데… 어때? 향이 끝내주지?”
한도린이 감탄사를 흘리며 웬일이냐는 듯 돌아보자 이춘살이 자신만만하게 술이 가득 찬 술잔을 내밀었다. 잠시 술잔에 담긴 술의 향을 맡아본 한도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정확히는 뒤집어쓴 종이봉투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이춘살이 캬하하 하고 웃고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지. 진순이도 준비해온 게 있다고 했거든!”
이춘살이 자신을 돌아보며 의기양양하게 하는 말에 미진순은 쑥스럽게 웃으며 상자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별건 아니고… 같이 해보면 재밌을 것 같아서 가지고 왔어.”
반구형의 은색 몸체와 일렬로 박혀있는 미니 전구,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위쪽 표면에 손바닥 모양이 새겨진 기계장치. 미진순이 꺼낸 물건을 보던 이춘살과 한도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거… 그거 아냐? 거짓말 탐지기. 막 파티 같은 거 할 때 장난용으로 쓰는 거!”
“그런데 우리가 알던 거랑은 조금 다르네. 훨씬 그럴듯해 보여.”
더 세련되어 보인다는 한도린의 말에 미진순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이 거짓말 탐지기는 진품인걸?”
“...응?”
“응?”
“정말로 거짓말하는 지 잡아낼 수 있는 진품?”
“응. 이런 건 진품으로 해야지 확실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해맑은 미소를 짓는 미진순. 그 미소를 보며 이춘살과 한도린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진순이 쟤, 원래 저런 성격 아니었지 않아?’
‘아니, 아마 지금 자기가 어떤 짓을 했는지 자각도 못 하고 있을걸?’
진실 게임을 하는 곳에서 진짜 거짓말을 구분해 낼 수 있는 진품을 사용한다는 건, 말 그대로 배수의 진을 치고 게임에 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100%의 진실을 말하던지, 아니면 술을 마시던지.
‘미진순 저 계집애가 그런 걸 생각하고 들고 왔을 리가 없지.’
이춘살은 속으로 혀를 차며 거짓말 탐지기를 옆으로 슬쩍 치워두며 말했다.
“일단 이걸로 진실 게임 하는 건 술 좀 마시고 난 다음에 하자. 원래 이런 건 안에 술 좀 들어가야지 재밌어.”
물론 이춘살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제일 순진한 먹잇감(?)이 자기랑 같이 먹어달라고 양념까지 갖다 바친 꼴 아닌가? 하지만 속이 새까만 구미호는 서두르지 않고 옆으로 치워둔 거짓말 탐지기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원래 맛있는 건 마지막에 먹어야지 제맛이니까. 물론 그런 친구의 속마음을 알 턱이 없는 순진한 미믹은 ‘그런가?’하고 넘어갔지만 말이다.
미진순의 진순 박스까지 술상 앞으로 옮겨지고 세 인외의 본격적인 송년회가 시작되었다. 술잔이 한잔, 두잔 돌기 시작하자 얌전했던 미진순과 조용하게 술만 마시던 한도린의 텐션도 오르기 시작했다. 본래 쾌활하고 애주가인 이춘살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캬~! 술맛 끝내주는데? 우리 주지 스님이 애기중지하며 숨겨놓고 먹던 이유가 있었네!”
평소에 마시지 못해 눈독만 들이던 산삼주를 마시며 헤실헤실 웃는 이춘살. 그리고 그 옆에서 취기가 올라 살짝 붉어진 얼굴로 술을 홀짝이던 미진순이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도린아~ 이번 체조대회 우승이 3연승이었던가…? 음, 어쨌든 우승 축하해!”
“3연승 맞아. 그나저나 진순이 너 벌써 취한 거야? 축하한다는 말만 벌써 세 번째 하고 있어, 너.”
“헤헤, 그런가? 쪼오금 알딸딸한 것 같기도 하구… 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 체조계의 신예 있잖아. 최예… 이름이 뭐였더라?”
“아, 예린이? 아마 나 다음으로 체조대회 연승할만한 애는 걔밖에 없을걸? 재능도 있고, 노력도 하고. 그런데 예린이는 왜?”
“혹시 둘이 사귀어?”
“푸흡!”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미진순의 기습 질문에 한도린은 가슴팍에 들고 있던 자신의 얼굴에 술잔을 엎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습격(?) 한동안 콜록거리던 그녀는 다급히 티슈로 얼굴을 닦으며 되물었다.
“뭐? 누가 그런 소리를 해?”
“OO일보에서! 그 최예린이라는 신예랑 도린이 너가 같이 찍힌 사진들도 많았구, 네가 쓰고 다니는 것처럼 종이봉투 쓰는 사진도 있던데? 그래서 두 사람이 커플룩을 한 거다 뭐다 하는 기사들이 잔뜩…!”
해맑은 표정으로 팔까지 붕붕 흔들며 말하는 미진순의 모습에 한도린은 속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술잔에 술을 다시 채우고 단숨에 들이킨 후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후. 일단 제일 중요한 것부터 말하자면, 걔랑 나랑 그런 사이 아니야. 나랑 같이 찍힌 사진이 많은 건 걔가 쓸데없이 집요하게 따라다녀서 그런거고, 종이 봉투를 쓴 사진은 슬럼프를 극복한다고 하면서 내가 하는 행동을 다 따라 했을 때 찍혔던 사진이야. 걔는… 뭐랄까, 쓸데없이 열성 팬 기질이 있는 후배일 뿐이라고, 알았어?”
“에이…”
단호한 한도린의 부정에 미진순은 김빠진다는 듯한 얼굴로 박스에 몸을 기대었고, 그 모습에 한도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도대체 어떤 걸 기대했길래 그런 반응인 건데…?”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춘살이 빈 술잔을 채우며 낄낄 웃었다.
“미진순 얘가 평소 좋아하는 거 보면 뻔하지 뭐. 진순이의 박스 안을 보니까 순정 만화책이랑 로맨스 소설이 가득하던데?”
“으앗, 그거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잖아!”
갑작스러운 이춘살의 폭로에 당황한 미진순이 손을 휘저었고, 덩달아 움직이는 촉수를 이리저리 피하면서도 이춘살은 술잔에서 술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묘기(?)를 보여줬다. 그 모습을 보며 한도린은 ‘또 저러네’라고 중얼거리며 술잔에 담긴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장난치는 이춘살과 매번 당하는 미진순의 모습은 셋이 모였을 때 매번 볼 수 있는 일상과도 같았다.
그렇게 체조계의 신예와 여왕의 커플설이라는 이야깃거리가 지나가고, 다음 타겟이 된 건 이춘살의 템플 스테이였다.
“그런데 나는 가끔 춘살이가 절에서 얌전히 지낸다는 게 안 믿겨. 옛날에는 구미호계의 문제아로 유명했던 저 이춘살이, 절에서 수행이라니… 예전의 내가 그런 소리를 들었으면 절대 안 믿었을걸?”
“야, 한도린. 문제아가 아니고 풍류를 아는 거였거든? 그리고 나도 내가 원해서 절에 틀어박힌 게 아니라고.”
한도린의 팩트 폭행에 이춘살이 술을 마시다 말고 발끈하여 항변했지만, 이어진 미진순의 말에 격침당하고 말았다.
“그러기 싫었으면 절 앞에서 지나가는 행인 붙잡고 매혹을 걸지 말았어야지! 그러다 걸려서 주지 스님이 붙잡은 거자나~”
“윽…”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미 잔뜩 취한 미진순은 헤실헤실 웃으며 조곤조곤 팩트로 이춘살을 침몰시켰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지적에 말없이 술잔만 붙잡고 부들부들 떠는 이춘살.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주는 사람 또한 미진순이었다.
“그래도 난 춘살이 너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강제로 붙잡혀서 수행 중이지만 주지 스님을 원망하지 않고 잘 지내잖아! 그러기 쉽지 않은데, 우리 춘살이 착하다, 착해~ 헤헤.”
말을 마친 미진순이 헤헤 웃으며 이춘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이춘살은 그 손을 슬쩍 피하며 툴툴댔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태도와 다르게 아홉 개의 꼬리는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고, 그걸 목격한 한도린은 웃음을 꾹 참기 위해 노력했다.
“요 계집애, 취했네 취했어. 그렇게 말해도 떨어지는 거 없거든? 나는 그냥 늙은이 한 명 구해주는 셈 치고 있는 거야, 알겠어?”
“푸핫!”
“한도린? 갑자기 왜 웃어?”
“아니야, 그냥 갑자기 재밌는 게 떠올라서.”
한도린은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이춘살의 물음에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한 꼬리의 반응에 골든 리트리버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고 말하면 분명히 성을 낼 테니까. 이춘살은 뭔가 찜찜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한도린을 바라봤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다시 술잔을 들었다.
“자, 그럼 다시 짠하자, 짠!”
“좋아! 춘살이와 주지 스님의 평화로운 템플 스테이를 위하여, 건배~!”
“건배~!”
이춘살이 술잔을 들어 올리자 잔뜩 흥이 오른 미진순도 냉큼 따라 들어 올리며 선창했고, 그 말에 한도린과 이춘살이 피식 웃으며 건배를 외치며 술을 한 번에 입으로 털어 넣었다. 짜릿하게 내려가는 뜨거운 감각과 함께 술기운이 올라오자 이춘살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으~ 좋다, 좋아! 아, 그러고 보니 진순이 너, 몇 달 전에 보냈던 문자는 무슨 뜻이었어?”
이춘살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어보자, 술의 쓴맛에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미진순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으응? 무슨 문자~?”
“오타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 없는 박스녀?랑 그 옆에서 옆에서 맞장구치는 엘프 때문에 속상하다는 내용이었던 거 같은데? 그게 도대체 뭔 소리야?”
“박스녀랑 엘프? 아, 그 나아쁜 놈들? 아주 못된 놈들이야! 무슨 남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무슨 폐기물마냥 말하고. 히잉…”
브꼴람(일명 박스녀)과 테리(일명 오토코노코 엘프)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급격히 우울해지는 미진순의 모습에 이춘살은 당황했지만, 옆에 있던 한도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빵 터졌다. 겨우 웃음을 멈춘 한도린이 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춘살아, 내가 설명해 줄게. 나한테도 그 문자가 와서 진순이에게 전화했거든? 진순이가 신세 한탄을 하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진순이의 입장이 이해가 가면서도 정말 웃기더라.”
그리고 한도린이 미진순으로부터 들었던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가만히 듣고 있던 이춘살도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시원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 박스녀가 진순 박스인걸 보고 그대로 돌아서서 뒤도 안 보고 가버렸다고?”
“응, 그거 때문에 진순이가 자존심 상해서 그날 밤에 울었대.”
그 동네에서 유명한 박스 성애자 브꼴람이 미진순의 박스를 발견하고 다가올 때 미진순이 집을 빼앗길까 봐 긴장했지만, 막상 브꼴람이 진순 박스인걸 보고 미련 없이 돌아서자 자존심 상한 미진순이 눈물을 흘렸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 박스녀랑 같이 다니던 엘프가 마을 미관을 해친다고 환경미화원분에게 치워달라고 했나 보더라고? 거기서 웃긴 건 그 옆에 다른 잡동사니들도 있었는데 환경미화원분도 납득하고선 진순 박스만 옮기려 했다는 거야. 진순이가 그 얘기 하면서 ‘진순 혐오를 멈춰주세요…’라고 울먹이는데 그때 너무 귀엽더라.”
동네 사람들의 진순 혐오에 의해 집이 철거(?)당할뻔한 썰까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인 이야기가 하나씩 한도린의 입에서 풀려나왔고, 이야기를 들을수록 이춘살은 웃다 못해 호흡곤란이 온 것처럼 끅끅대며 웃었다.
“푸하하하! 하아, 하… 아, 진짜 웃다가 숨넘어가겠네. 진순아, 많이 속상했어?”
겨우 웃음을 그친 이춘살이 미진순을 보며 물었지만, 이미 그녀의 박장대소에 잔뜩 삐진 미진순은 박스를 닫고 잠수하듯 들어간 상태였다. 그런 미진순의 잠수에 이춘살은 진순 박스에 다가가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우리 진순이 많이 속상했겠네. 사람들이 막 진순 혐오 때문에 막 대하고, 박스녀는 박스 취급도 안 해주고 말이야. 내가 진순 박스가 아니라 다른 박스로 둔갑시켜줄까? 그러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이춘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진순 박스를 손가락으로 훑자, 박스 윗부분이 살짝 열리고 미진순이 고개만 슬쩍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돼. 이 박스는 마초가 좋다고 했던 박스란 말이야.”
‘마초’는 진순 박스에 들어간 미진순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이름도 지어줬던 남자를 미진순이 부르는 애칭이었다. 어디론가 말없이 사라져버린 남자였지만, 마초와 함께 지냈던 그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미진순이었기에 그렇게 진순 혐오에 당하면서도 진순 박스를 포기하지 못하는 그녀였다. 예상치 못한 이름의 등장에 이춘살은 멈칫했지만, 다시 손을 뻗어 박스 위로 살짝 나온 미진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그냥 두자. 그리고 송년회하려 모였는데 너무 다운되어있지는 말고. 즐겁게 놀려고 모인 거잖아?”
“으응… 알겠어.”
그렇게 말하며 다시 박스 위로 꾸물꾸물 올라오는 미진순. 지금이야말로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이춘살이 드디어 판도라의 상자를 꺼내 들었다.
“좋아! 술도 적당히 들어갔으니 진순이가 가져온 거짓말 탐지기로 진실 게임 한번 해볼까?”
짐짓 과장되게 텐션을 올리며 거짓말 탐지기를 들고 온 이춘살의 말에 미진순의 눈에 다시 빛이 돌기 시작했다.
“응, 좋아! 해보자!”
“그럼 가지고 온 사람이 한번 시범을 보여줘야겠지?”
“응! …응?”
미진순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되물었지만, 재빨리 거짓말 탐지기에 미진순의 손을 올려놓고 묶은 이춘살이 한도린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한도린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진순이 너, 솔직히 처음에 상자 고를 때 진순 박스 고른 거 후회하지?”
“어? 어… 아닐걸? 꺄앗!”
미진순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한 순간 거짓말 탐지기에서 파직하는 스파크가 일어나며 미진순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 와중에 재빨리 손을 떼서 같이 감전되는 걸 피한 이춘살이 씩 웃으며 말했다.
“오, 진짜로 진품 거짓말 탐지기네?”
“이잇, 나부터 시작하는 게 어딨어! 이번에는 춘살이 너가 해봐!”
“그래? 알았어. 이번엔 내가 해보지 뭐.”
약이 바짝 오른 미진순의 주장에 이춘살은 순순히 거짓말 탐지기에 손을 올렸고, 미진순은 그 모습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질문했다.
“이춘살, 너! 사실 주지 스님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지!”
“패스, 술 한잔 마시면 되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떼고 술잔의 술을 단숨에 들이키는 이춘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미진순은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런 게 어딨어? 반칙이야, 반칙!”
“원래 진실 게임은 대답 못 하면 술 마시는 거잖아?”
미진순의 항의에도 이춘살이 태연하게 대답하며 뻔뻔하게 굴자, 오히려 미진순이 ‘그렇긴해…’하며 한풀 꺾였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던 미진순. 그녀는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관전하고 있던 한도린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럼, 이번엔 도린이 너 차례야!”
“그래, 질문해봐.”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하는 한도린의 모습에 미진순이 멈칫했지만, 이미 낙장불입이 되어버린 상황! 미진순이 잠시 고민하다 질문을 던졌다.
“어… 그래, 도린이 너 최예린이라는 신예랑 진짜 아무런 관계도 아니야?”
“응. 그냥 체조계 선후배 사이일 뿐, 다른 관계는 없어.”
띵!
답변이 사실임을 뜻하는 초록 불이 거짓말 탐지기에 뜨고, 당황하는 미진순의 양옆으로 두 늑대(?)가 슬며시 다가오며 말했다.
“이제 너 차례네, 진순아?”
“그러게 말이야. 준비는 된 거지?”
“으엣… 우리 그냥 이거 안 하면 안될까?”
슬금슬금 진순 박스 속으로 가라앉는 미진순의 말에 이춘살과 한도린이 웃으며 미진순의 본체를 잡고 끌어올리는 것으로 대신 답했다.
미진순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후일담 조각글(미진순의 흑역사, GET!)-
털썩-
결국 술기운에 못 이겨 진순 박스에 엎어진 미진순의 모습을 보며 이춘살이 말했다.
“도린아, 진순이가 부탁해서 찍긴 했는데… 지금 이 영상, 진순이한테 보여줄 거야?”
“글쎄, 아마 보여주면 수치사하지 않을까? 그냥 우리가 가지고 있자.”
엎어진 미진순 앞에 놓인 캠코더. 그 화면에는 미진순이 잔뜩 취한 채로 울먹이며 마초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가 재생되고 있었다.
[마초야, 어디에 있든지 나 잊으면 안돼에~ 네가 제일 좋아했던 진순 라면도 항상 한 봉지씩은 가지고 있으니까… 훌쩍. 잘 살아라아~!]
이춘살과 한도린, 미진순의 흑역사 G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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